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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100

Cover Story ERICA 본관에 연말을 알리는 찬란한 빛이 내려 앉았습니다. 올 한 해 ERICA는 혁신과 성장, 끝없는 도전으로 달려왔습니다. 그 모든 성과는 온 힘을 다해 달려온 대학 구성원의 노력이 빚은 값진 결실입니다. 100권의 HY ERICA에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대학 구성원의 모습, 그 노력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비전의 사람이 모인 이곳, ERICA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복권 당첨금을 사이에 둔 남과 북의 코믹한 접선

오랜만에 등장한 한국형 코미디 영화 <6/45>의 실 관람객 평점은 8.09(네이버 영화 기준). ‘극장에서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만인가, 로또와 군인의 조합이 너무 신박하다’라는 관람평이 가득하다. 이토록 무해한 코미디 영화라니, 관객들에게 퍽 반가운 작품이다. 오랜 시간 극장에서는 코미디 영화가 매우 드물었다. 아니 웰 메이드 코미디 영화를 찾기 어려웠다. 불편한 요소 없이 영화에 오롯이 몰입하게 하며 큰 웃음을 줄 영화를 그리워했던 관객은 박규태 감독의 한방에 정확히 저격당했다. 관객들이 뭘 좋아할지 몰라 전부다 준비한 듯 꽉 찬 구성과 설정은 한국 코미디의 진가, 코미디의 부흥을 기대하게 한다. 영화 <6/45>는 박규태 감독이 15년 만에 선보인 연출작이다. 100억이 넘지 않는 저예산 영화로서 손익분기점을 일찌감치 넘어서며 큰 흥행을 일으킨 결과에 대해 박규태 감독의 감회도 남다르다.

“유명 감독의 제작, 유명 스타의 주연, 거대한 예산의 제작비, 메이저급 투자사의 영화와 비교하면 일단 저희 영화는 그런 영화들과는 좀 다르거든요. 그러한 작품들과 극장에서 경쟁을 해야 하니까 조금 더 열심히 작품을 만드는 데 집중했습니다. 사실 관객들은 예산이 크고 작음을 기준으로 관람을 하는 게 아니라 재미있는 걸 선택하잖아요. 그래서 이야기의 힘에 더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재미있는 영화, 웃기는 영화라는 입소문은 조용히 퍼져나가 2022년 10월 20일 기준 198만 명의 관람객이 <6/45>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았다. 군대라는 설정에 남북 접선이라는 대치 상황. 그 사이에 놓인 로또 용지 한 장은 그동안의 군 소재 영화에 나타난 클리셰를 뒤엎는다. 참신함과 갈등의 매력, 진정성을 중요시 한다는 박규태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상황적 참신함, 남북 간 흥미로운 갈등 구도, 그리고 주제를 대하는 인물의 진정성을 성공적으로 나타냈다.

“충무로에는 ‘예측을 벗어나되 기대는 저버리지 말라’는 유명한 속설이 있어요. 이야기가 진행될 때 항상 다음에 어떤 내용이 나올 것 같다는 예측을 하게 되는데, 그 예측을 벗어날 때 재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죠.”

박규태 감독의 이번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탄탄한 스토리라인이 가지는 경쟁력뿐만 아니라 충무로 루키의 발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틀에 박힌 관념에서 벗어나는 캐릭터 설정은 코미디 영화를 오랫동안 써온 박 감독만의 디테일한 안목에서 비롯됐다. 코믹 연기는 정극 연기와 달리 보는 이들을 웃겨야 겠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몰입하기가 어려워 배우들로서도 매우 까다롭게 여겨지는 분야다. 때문에 적절한 캐스팅이 매우 중요하다.

“남북 병사가 등장하는 영화이니 만큼 당연히 젊은 배우를 섭외했습니다. 특별히 각각의 캐릭터가 가진 특성을 얼굴에 고스란히 담고 있는 배우들을 캐스팅했고 좋은 결과를 낳은 것 같습니다.”

6/45는 박규태 감독이 걸어오며 누적된 시간의 결과

평소 영화를 좋아했던 박규태 감독은 한양대학교 ERICA의 영화 동아리 소나기 출신이다. 8㎜, 16㎜ 필름영화로부터 시작된 영화에 대한 관심은 점차 깊은 애정으로 발전했다. 군 전역 후 학교를 휴학하고 무작정 충무로를 찾아간 그 날이 박규태 감독이 영화에 발을 딛게 만든 터닝 포인트였다.

“무작정 휴학하고 충무로를 갔어요. 당시 <천재선언>의 제작부로 들어가 현장을 경험하던 중에 저를 눈여겨본 영화사에서 2년 등록금을 내 줄테니 함께 일하자고 제의해 주셨죠. 그렇게 인연을 맺고 쓴 첫 시나리오가 바로 故최진실, 이경영 배우 주연의 <베이비 세일>이었습니다.”

영화 <베이비 세일(1997)>의 각본을 만들 당시 박규태 감독은 대학교 3학년이었다. 좋아하는 것, 푹 빠져있는 것에 몰입해 ‘일단 시도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영화계에 발을 딛은 박규태 감독은 이후 <북경반점(1999)>, <달마야 놀자(2001)>, <박수건달(2013)>, <아빠를 빌려드립니다(2014)>의 각본 및 각색을, <날아라 허동구(2007)>의 각본과 감독을 맡았다. 박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알 수 있듯 특수한 환경과 상황에 놓인 인물의 모습은 매우 생동감 있게 나타난다. 특히 각본을 맡았던 <달마야 놀자>, <박수건달>의 경우 조직폭력배라는 캐릭터를 속세와 동떨어진 사찰, 혹은 무당집에 설정하면서 그 속에서 캐릭터가 녹아들어 다양한 모습을 나타낸다는 점이 흥미를 유발한다. 캐릭터가 있을 법한 공간이 아닌 새로운 공간에 놓였다는 설정 자체가 새롭고, 때문에 그 안에서 그 캐릭터가 어떻게 움직일지 관객으로 하여금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영화의 콘셉트를 단 한 줄로 정리하는 것을 충무로에서는 ‘로그라인’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콘셉트 영화들이 이 로그라인에 굉장히 큰 공을 들입니다. 남들에게 설명했을 때 설득이 되는 지, 즉각적인 반응을 살펴보는 것이죠.”

박규태 감독은 If what으로 상황을 대입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이러저러한 방향으로 피칭한 후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본다고 한다. 보통 즉각적으로 좋은 반응이 나올 땐 결과물도 좋았다고. 만약 군대에서 1등 로또가 당첨됐다면, 그리고 그 로또가 북쪽으로 날아가 버렸다면. 이러한 여러 플롯이 모여 박규태 감독만의 코미디 영화를 만들어 낸 듯하다. 전혀 다른 상황을 창조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접해온 다양한 설정 속에서 한 끗의 디테일로 차별화를 이끈다는 것은 박규태 감독의 가장 큰 비기인 듯하다. 박 감독이 이처럼 유머러스와 휴머니즘이 결합한 코미디 영화에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유머란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 중에 가장 고도의 지적유희다. 누군가를 웃음 짓게 하는 것은 어렵지만 가치 있는 일이다’라는 구절이 있어요. 이것이 바로 제가 코미디 영화를 만드는 이유죠.”

유머러스는 긴장을 풀게 하고 웃음을 통해 건강한 에너지를 전달하는, 삶에 있어 양질의 윤활유다. 20대 초반 대만의 리얼리즘 작품을 통해 영화에 깊이 매료된 이후 충무로 영화제작사의 제작부로 시작해 흥행에 성공한 코미디 영화감독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 27년의 시간이 흘렀다. 운이 7할이면, 기운이 3할이라는 ‘운칠기삼(運七技三)’. 박규태 감독은 살아가다 보면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이 더 많으니 어려울 때는 운이 따라주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라던 학부시절 교수님의 조언을 여전히 떠올린다고 말한다. 삶의 무게 속에서 즐거움을 되찾게 하는 박규태 감독은 우리의 삶을 다시 긍정하게 하는 에너지를 전달하고 있다.

영화 <6/45>의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