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의 어느 날, 전 세계 최다 스테디셀러 공연인 ‘호두까기 인형’ 무대 준비로 와이즈발레단 연습실이 북적인다. 스트레칭으로 몸을 예열하고 토슈즈를 손질하는 배우들, 연습실 중앙을 종횡무진하는 주역 배우들은 까다로운 동작을 수없이 되풀이한다. 그들의 호흡을 지켜보며 무대의 완결성,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홍성욱 예술감독의 두 눈도 분주하다. 무대에서 테크닉을 펼치는 건 주역 배우들인데 홍 감독의 모습에서는 나태함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등을 꼿꼿이 세우고 때로는 배우들에게 다가가 적극적으로 디렉션을 펼친다. 홍감독뿐만 아니다. 한양대 ERICA 동문인 김수연 부단장과 서울캠퍼스 무용학과 출신인 김길용 단장 역시 배우들의 동선과 연기 하나하나를 주시한다. 와이즈발레단이 민간 발레단으로 긴 세월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작은 것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는 열정 때문일 터다.
“와이즈발레단의 시작은 김길용 단장과 저를 포함한 남자 발레리노 넷이 프로젝트 그룹으로 시작한 ‘즐거운 녀석들’이었습니다. 무대를 즐기는 동시에 관객들도 발레를 즐거워할 수 있도록 무대를 만들어 보자는 취지였죠. 덕분에 관객들의 좋은 호응을 이끌었고, 이를 계기로 주변으로부터 발레단 창단 제의를 받게 되면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작품에 따라 공연 레퍼토리가 있다 해도 무용은 파트너와 함께 합을 맞추는 과정이 매우 중요한 장르다. 특히 언제나 무대에 오를 수 있는 몸으로 준비되어야 하기 때문에 압도적인 연습량이 요구된다. 무대의상 준비 등 부대비용은 말할 것도 없다. 작품을 올리기 위해 준비를 하면 할수록 현실적인 문제들이 겹쳤지만, 포기할 수 없었기에 똘똘 뭉쳐 걸어오다보니 어느덧 20주년을 맞이했고 매년 100회 공연을 올리는 규모로 성장했다. 연 100회 공연이면 3일에 한 번꼴로 작품을 올리는 것이니, 무용수들에게도 공연과 무대에 더욱 에너지를 쏟을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진다. 무대가 점점 커질수록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해지기 마련. 와이즈발레단은 무용수들이 작품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운영과 경영에서도 다양한 수익모델을 갖추며 안정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발레단으로서 예술적으로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무용수들이 편안하게 무용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다지는 것이 창단 목적 중 하나였습니다. 무용수들이 발레단을 ‘나의 직장’이라고 받아들이게끔 하는 것을 가장 우선시했죠.”
단장부터 스태프 모두 하나 된 마음으로 발로 뛰며 운영을 이어간 결과 와이즈발레단은 국립발레단, 유니버설발레단에 이어 발레 전공 학생들이 선호하는 무용단으로 자리매김했다. 홍 감독을 비롯해 김길용 단장, 김수연 부단장 등 와이즈발레단을 이끈 그들은 발레단이 다음 세대와 그다음 세대로 잘 이어져 가치와 명맥이 지속되길 꿈꾼다.
내가 죽은 후에도
창작한 작품은 계속
무대에 오를 수 있었으면
발레를 생각하면 흔히 ‘백조의 호수’, ‘지젤’과 같은 고전작을 떠올리기 십상이라, 발레의 창작성은 체감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고전으로 일컫는 작품들도 당시에는 창작이었다. 그렇기에 발레는 고전이라는 이름에 묶어두기엔 너무나도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장르다. 홍성욱 예술감독도 와이즈발레단을 통해 다양한 창작 무대를 올리며 주목을 받았다. 그의 대표작 <Last Exit(라스트 엑시트)>와 <Baroque goes to Present(바로크 고즈 투 프레젠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Last Exit’는 와이즈발레단 창단 10주년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창작 당시 우리 사회에 자살률이 큰 이슈였어요. 당시 드라마 ‘미생’을 보며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그늘에 주목하면서 마지막 출구로 자살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가슴 아픈 현실에 대해 조명하고자 했습니다. ‘백조의 호수’ 음악을 배경에 두고 배우들은 모두 양복을 입고 등장했죠.”
‘Last Exit’는 백조의 호수 레퍼토리를 현 상황에 맞게 성공적으로 재해석하면서 고전 발레의 우아함과 감각적인 무브먼트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7년 무대에 올린 그의 창작품 중 하나인 ‘Baroque goes to Present’는 창작자의 고통을 소재로 모던 발레와 클래식 발레를 한 무대 위에 올려 관객들에게 선보이고자 새롭게 시도한 작품이다. 2017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선정되는 등 클래식, 모던 발레의 조화와 압도적인 연출로 주목을 받았다.
“창작은 당연히 도전이죠. 제가 얼마나 살지 알수 없지만, 할 수만 있다면 더 좋은 작품을 한두 작품이라도 더 크게 만들어 올리고 싶어요. 제가 죽고 나서도 제가 만든 작품은 계속 무대에 오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더 좋은 작품을 올리고 싶다는 욕심은 홍 감독에게 다양한 도전을 요구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무명이나 다름없던 재미 안무가 주재만 씨와 협업해 무대에 올린 ‘VITA(비타)’도 그의 도전 중 하나다.
“주재만 안무가에게 30분짜리 짧은 작품을 함께 만들어보지 않겠냐고 먼저 제의했었죠. 그렇게 작품 ‘Intermezzo(인터메조)’를 같이 올렸는데 관객이나 연기하는 배우들 모두 작품을 좋아했어요. 배우가 무대에서 몰입하면 그 에너지가 관객들에게도 전달되거든요. 이후 1시간짜리 작품을 함께 만들어보자고 제의해 올리게 된 작품이 2021년 선보인 ‘VITA’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가 겹쳤던 터라 작품을 올리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는데요. 관객의 반응은 열광적이었습니다.”
‘단순히 좋다는 수준을 넘어 어마어마했다’는 그의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1시간 20분의 러닝타임을 쫀쫀하게 끌고 가며 돌풍을 일으킨 ‘VITA’는 국내 최대 발레 축제 중 하나인 ‘대한민국 발레축제’에 초청작으로 무대에 올랐다. SNS에 입소문이 도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데일리 문화예술 대상’은 국내 문화예술 모든 장르에서 최우수 작품을 수상하는 매우 권위 있는 시상식 중 하나죠. 국악, 대중가요, 뮤지컬, 오페라, 연극, 무용 등 다양한 장르를 수상하는데 그중에서도 저희가 올렸던 ‘VITA’가 전 장르를 통틀어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당시 저희의 경쟁상대는 아이돌 그룹 ‘세븐틴’이었습니다.”
세종문화회관을 가득 채웠던 세븐틴 팬들에게는 안타까운 소식이었을지 몰라도 발레 장르의 작품이 대상을 수상했다는 건 이례적인 일, 무용계의 센세이션이었다. ‘VITA’라는 작품을 통해 주재만 안무가는 국내 유수 무용단과 작품을 올리며 입지를 다지게 됐고, 와이즈발레단은 세계적 수준의 발레단으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됐다. 더 좋은 무대를 만들겠다는 열정은 단지 창작이라는 결실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숨은 보석을 찾아내고, 최고의 시너지를 창출하는 그 모든 것이 무대를 향한 애정이다.
미국 유명 안무가 마사 그레이엄은 ‘춤은 마음의 언어’라는 말을 남겼다. 그 명언처럼, 와이즈발레단은 열정과 애정을 쏟는 무대로 마음의 언어를 표현하는데 전력을 다한다. 와이즈발레단과 홍성욱 예술감독의 무대가 관객 마음에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