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부 교수
답을 찾으려면 지금의 불확실성을 초래한 요인들을 글로벌 차원의 큰 그림 속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세계경제의 변화를 민감하게 반영하는 나라다. 수출주도형 경제로서 탄광 속 카나리아처럼 세계경제의 흐름에 가장 빠르게 반응한다.
세계경제의 변화를 일으키는 근본적 동인으로는 무엇보다 국가 간의 기술패권 경쟁을 꼽을 수 있다. 18세기 산업혁명 이래 새로운 기술을 장악해 기술패권을 획득한 나라가 정치적으로도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유럽의 작은 나라였던 영국은 1차 산업혁명을 통해 기술패권국이 된 후 대영제국을 건설했다. 전기와 화학산업을 중심으로 한 2차 산업혁명 때는 독일이 기술력을 바탕으로 패권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두 차례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결국 기술패권과 정치패권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퍼스널 컴퓨터와 정보통신을 바탕으로 한 3차 산업혁명 역시 미국이 승자가 됐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인공지능을 중심으로 한 4차 산업혁명은 미국과 중국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형국이다.
기술패권과 정치패권이 안정되면, 패권국은 자유무역과 세계화를 추진한다. 패권국은 운동장이 넓을수록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나 기술패권이 불안정해지면 패권국은 세계화를 후퇴시키고 보호무역으로 되돌아간다. 경쟁자를 위협으로 간주하는 순간 패권국은 ‘운동장을 넓게 펼쳤더니 남 좋은 일만 하게 되네’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최근 흐름을 보면, 세계화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춤했고 2017년 트럼프 1기 정부가 들어선 이후 둔화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2025년에 시작되는 트럼프 2기 정부에서는 보호무역 흐름이 더욱 강화되며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후퇴할 것이라는 공포가 시장에 퍼져 있다. 그동안 세계화의 흐름을 타고 중국을 활용해 선진국에 합류한 한국이 앞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과거의 성장 방식과 제도 속에서
이익을 얻던 이들을
어떻게 변화에 동참하게 하고
협력하도록 설득할 것인지가 중요
수출주도형 성장 전략을 택한 한국은 그동안 세계화의 혜택을 많이 봤지만 그 부작용도 그만큼 많이 경험해왔다. 역사를 보면 세계화는 대개 양극화를 초래했다. 시장이 넓어지면, 넷플릭스 때문에 스타급 배우의 몸값이 오르듯 소수의 승자는 과거보다 더 큰 이익을 얻기 마련이다. 돈이 한쪽에 몰리면 그 돈은 수익을 찾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경제의 금융화를 촉진한다. 주택을 비롯한 많은 자산이 금융상품처럼 거래된다. 넘치는 돈이 자산시장에 모여 자산가격을 올린다. 소득에 비해 집값이 너무 비싸진다. 그러면 기득권 없는 청년들이 불리해진다. 빚을 많이 내야 집을 살 수 있고, 소득의 많은 부분을 원리금 상환에 써야 한다. 청년들이 결혼하고 출산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저출산이 사회문제가 되고 계층 간, 세대 간 갈등도 심화된다.
이런 세계화의 명암을 가장 뚜렷하게 경험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이제 세계화의 흐름은 또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 시점에 세계화의 후퇴로 인한 손해는 줄이고, 동시에 그동안 경험했던 부작용은 고치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세계화의 후퇴로 인한 피해를 줄이려면 기술력을 강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트럼프 정부는 관세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으로 예측된다. 관세도 세금이니만큼 누군가 부담을 진다. 우리가 많이 부담을 질 것인지 상대방이 많이 부담을 질 것인지는 우리 상품이 얼마나 대체 불가능한지에 달려 있다. 가격과 무관하게 한국 상품을 꼭 써야 하면 관세 부담은 상대방이 많이 질 수밖에 없다. 즉, 대체 불가능한 기술력이 핵심이다. 기술력은 무역 협상에서도 유리한 지렛대로 활용될 수 있다. 아울러 수출시장을 다변화하는 것도 협상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적응 과정을 원활히 이끌면서 국내 경제의 활력도 유지하려면 재정정책을 비롯한 정부 정책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다른 한 편으로 세계화에 수반됐던 양극화와 금융화의 부작용을 해결하고 저출산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적절한 정부 정책이 필요하다. 100년 전 세계는 비슷한 문제를 겪었고 이를 해결하는 데에는 정부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선진국 정부들은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정부의 역할이 성공하려면 정부-시장-시민사회의 협력, 그리고 상호 견제와 균형이 필요하다. 미국에서도 1960년대에 정부와 대기업, 노동조합이 서로 협조하고 양보하면서 균형을 이뤄 생산과 분배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낸 바 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산업구조도 다르고 글로벌 환경도 다른 만큼 보다 창의적인 정책과 제도가 필요할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특히 과거의 성장 방식과 제도 속에서 이익을 얻던 이들을 어떻게 변화에 동참하게 하고 협력하도록 설득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선진국이었다가 쇠락한 나라들이나 중진국 함정에 빠진 나라들은 대부분 기득권의 저항과 이해관계의 충돌을 해결하지 못한 나라들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경제가 저성장으로 갈수록 이해관계 조정 문제는 더 어렵고 중요해진다. 성장이 잘될 때는 나눠줄 것이 많으므로 조정이 비교적 쉽지만 저성장일 때는 그렇지 않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가 어려우면 기득권 지키기, 한탕주의, 그리고 남의 것을 가져오는 지대추구 활동에 더 집착하기 쉽다.
글로벌 환경의 변화가 빠른 만큼 우리 사회와 경제도 해묵은 난제들을 빨리 해결하고 새로운 돌파구와 기회를 찾아 나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