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급변하고 있는데 학과 위주의 대학 조직은 우리나라에 대학이 생긴 이래 변함이 없었죠. 경직된 조직 체계에서는 달라진 사회에서 요구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어렵습니다.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조직으로 바뀌어야죠.”
2023년 6월 교육부는 각 대학이 학문 체계를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현행 시행령 내 학과·학부제 원칙을 폐지하기로 했다. 학과·학부 체제로 이뤄진 대학의 기본 조직체제가 70여 년 만에 개편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조직 개편에 그치지 않는다. 대학 교육의 총체적인 혁신을 불러올 것이기에 매머드급 파장이 예상된다. 무엇보다 교육 수요자 중심의 제도 개편이 기대된다.
“지금까지는 막연한 적성이나 점수에 맞춰 학과를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대학에 입학하면 그 전공이 평생 가는 것이죠. 하지만 자율전공학부는 대학에 들어온 후 다양한 학문을 접하며 충분히 탐색하고 원하는 공부를 한 뒤 추후 전공이 정해지는 체제입니다. 이는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학교 중심, 교수자 중심으로 운영되던 대학이 학생 중심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지금의 교육 체계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혁신적인 교육 체계가 만들어지는 것이죠. 자율전공학부는 ERICA 교육 혁신의 기본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에도 국내 대학들은 몇 차례 학부제를 도입한 바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다시 학과제로 복귀했다. 자율전공학부는 학부제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을까.
“예전 학부제는 기존의 학과 시스템은 유지한 채 학부별로 입학한 후 성적에 따라 학과가 배정됐습니다. 그래서 원하지 않는 학과에 배정된 학생들은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있었죠. 이는 엄밀히 학생에게 전공 선택권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자율전공학부의 차별점은 100% 학생들에게 전공 선택권을 보장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럼 인기 학과, 특정 강의에 학생들이 몰려 강의실 문제가 발생할 수 있겠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하이플렉스라는 온·오프라인 하이브리드 강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중입니다.”
현재 대내외적으로 대학 교육 혁신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강하게 형성되고 있다. 2026년까지 지방 대학 지원 사업인 ‘글로컬대학 30’ 사업이 추진되고 있는데 핵심은 대학 내부 학과 및 전공의 틀을 허무는 것이다. 아울러 첨단 산업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능동적이고 유연한 학사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다. 서울 및 수도권 대학도 이러한 변화에 부응해 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에 따라 ERICA도 2023년 7월 교육혁신처를 신설하고, 자율전공학부 운영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고 있는 중이다. 가장 주안점을 두는 부분은 ERICA만의 혁신 방향 설정과 교육 수요자 중심의 교육 체제 수립, 그리고 전 구성원의 공감대 구축이다.
우선 2025년 신입생부터 예체능, 약학과 등 특수 전문 분야를 제외한 모집 정원의 최소 15% 이상을 자율전공학부로 모집할 계획이다. 아직 논의 단계에 있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기본 운영 방향은 ‘직무 연계 모듈형 교육과정’이다. 이는 학생 선발 단계부터 계열 통합으로 모집하고, 인문계와 자연계 구분 없이 본인이 공부하고 싶은 분야의 과목을 수강하되 모듈형 전공 교육과정을 이수하는 것이다.
“수업 과목 선택은 전공 학과 기반이 아니라 모듈형으로 이뤄집니다. 예를 들어 반도체에 관심이 있다면 전자공학, 재료공학, 물리학, 나노광전자학 등 다양한 학과에 설계된 반도체 관련 수업을 학과의 경계를 넘어 모듈형으로 수강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수한 모듈형 교육과정들을 전공심의위원회에서 최종적으로 심의해 추후 전공을 정하는 구조입니다.”
자율전공학부로 입학하면 1학년 때는 기초 소양을 쌓고 각 계열, 전공별로 무엇을 배우고 어떤 분야로 진출할 수 있는지 탐색할 수 있는 교과목을 이수한다. 이때 본인의 적성과 희망 진로에 따라 체계적으로 교육과정을 선택할 수 있도록 전문가가 밀착 지원할 예정이다. 자칫 체계 없이 수강해 전공을 부여받을 수 없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다. 어떤 수업을 들어야 할지 고민인 학생들을 돕기 위해 ‘아카데믹 어드바이저’와 진로 설계 및 포트폴리오 관리를 지원하는 ‘커리어 어드바이저’를 운용할 예정인데, 이들은 자율전공학부 학생들에게 지속적으로 전문적인 컨설팅을 제공할 것이다.
1학년을 종료하며 주전공을 선택하면 본격적으로 전공 역량을 함양할 수 있는 전공 연계 모듈형 교육과정을 이수하게 된다. 학생 주도로 전공을 설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전공 변경도 가능하다. 전공 학과의 명칭도 손봐 지금과 다른 이름이 될 수 있고, 현재 ERICA에 없는 학과도 전공할 수 있다.
교육혁신처는 단순히 자율전공학부의 도입을 넘어 기존의 대학 체제를 근본부터 혁신하기 위해 설립됐다.
“1학년 때 수강해야 하는 교양 과목도 대대적으로 손볼 계획입니다. 현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전공을 선택하든 디지털 리터러시 역량을 위한 코딩과 누구나 예비 창업자가 될 수 있도록 경영 및 마케팅 역량, 그리고 디자인 감각과 디자인 싱킹, 글로벌 역량의 5가지 역량을 갖춰야 합니다. 이 5개 영역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교양 과목 수업으로 개설할 예정인데 이는 자율전공학부 학생뿐 아니라 전교생을 대상으로 운영할 방침입니다.”
ERICA의 교육 혁신 전략을 한마디로 제시하면 ‘빅블러(Big BLUR)’다. 즉, 온·오프라인, 전공, 학과, 단과대, 대학, 국가의 경계를 허물고, 교육 수요자 중심의 융합형 학사 제도를 구축하는 것이다. 실용 인재, 산학협력의 탁월성을 바탕에 둔 ERICA의 차별화된 전략이 더욱 빛을 발할 것으로 기대되는 대목이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공급하는 것이 이 시대 대학의 역할입니다. ERICA 교육 철학이 산학협력을 기반으로 실용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에 맞게 교육 시스템을 개편해 국내 대학 교육의 혁신을 선도하는 퍼스트 무버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