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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칩 지문, PUF

스마트홈, 스마트카, 스마트도시. 모든 것이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세상은 빠르고 편리하다. 하지만 그 네트워크로 정보가 유출되거나 해킹당할 수 있다는 위험도 도사린다. 이것이 바로 네트워크 시대의 빛과 그림자다. 그래서 안전하게 편의성을 누릴 수 있도록 보안 기술도 점점 발전하고 있다. 보안 기술은 소프트웨어 기반 기술과 하드웨어 기반 기술로 나뉘는데, 암호화 알고리즘을 활용하는 소프트웨어 기반 보안 기술은 월등한 연산 능력을 자랑하는 양자컴퓨터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구조적 한계를 갖고 있다.

이에 하드웨어 기반 보안 기술인 ‘PUF(Physical Unclonable Function, 물리적 복제 방지 기능)’가 부상하고 있다. PUF는 동일한 공정으로 제작되는 반도체 구조의 미세한 차이를 활용하여 보안키를 생성하는 기술이다. 고유한 물리적 특성을 암호화키로 사용하므로 복제하거나 위조할 수 없다. 하지만 사용 후 전자폐기물이 발생하고 개체 수가 늘어날수록 인증 과정에서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문제가 있다. 이에 홍석준 교수는 지난 3월 아세트산 나트륨 과포화 용액을 사용해 재사용이 가능하면서도 효율적으로 인증이 가능한 PUF를 개발해 국제학술지 ‘어드밴스드 머터리얼즈(Advanced Materials)’에 발표했다.

“아세트산 나트륨 과포화 용액이라는 재료가 다소 생소하게 들릴 수 있는데 사실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물질 중 하나입니다. 겨울에 흔히 사용하는 손난로를 보면 투명한 액체 안에 금속 조각이 들어있는데 이 액체가 바로 아세트산 나트륨 과포화 용액입니다.”

그동안 아세트산 나트륨 과포화 용액의 활용은 손난로처럼 열적 특성에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홍석준 교수는 결정화 과정에서 생성되는 미세구조와 그에 따른 기계적, 광학적 성질의 변화에 주목했다. 본 연구는 이렇게 아세트산 나트륨 과포화 용액의 광학적 특성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 없을까 고심하면서 시작됐다.

기존의 방식으로는
불가능했던 기술을
구현해 내는 연구자

홍석준 교수는 레이저로 대표되는 광학적 방법을 활용해 물질을 미세 혹은 정밀하게 가공하는 공정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아세트산 나트륨의 광학적 특성에 착안

“몇 백 마이크로미터의 직경을 갖는 아주 조그마한 유리구슬들이 3차원 공간에 무작위적으로 분산돼 있는 필름에 레이저를 조사하면 필름 내부에서 빛이 산란하며 스크린에 복잡한 간섭무늬를 생성합니다. 이러한 패턴은 유리구슬의 배열이 약간만 바뀌어도 크게 달라지기에 무작위성을 갖는 고유키로 활용될 수 있죠. 결정화가 일어난 고체 아세트산 나트륨에 레이저를 조사하면 스페클(speckle, 복잡한 반점 무늬) 패턴이 생성되는데 이로부터 고유키를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결정화를 통해 생성되는 내부 구조는 매번 미세하게 다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생성되는 간섭무늬 역시 고유한 값을 가져 PUF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 개발된 아세트산 나트륨 기반의 PUF 소자는 마이크로 히터를 사용해 온도를 조절함으로써 재결정화를 이룰 수 있다. 이는 손난로를 전자레인지에 해동해 몇 번이고 재사용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러면 처음 제작됐던 PUF와 전혀 다른 고유키를 생성할 수 있어 재사용이 가능해 전자폐기물을 줄이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

“PUF 소자는 복제가 불가능하며 고유하다는 점에서 사람의 지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소자입니다. 현재 각종 제품의 정품 인증 및 신분 확인을 위해 QR코드, 홀로그램 스티커 등이 디지털 지문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밀 제작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안전성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돼 점차 PUF 소자를 활용한 인증 방식으로 전환될 것입니다.”

인공지능 및 양자컴퓨터의 발달로 보다 안전한 물리적 소자 기반의 PUF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것은 자명하다. PUF 중에서도 광학적 PUF는 강력한 보안이 특징이다. 이에 아세트산 나트륨 기반 PUF 소자가 실제 산업계에 적용될 수 있도록 후속 연구도 진행 중이다. 아세트산 나트륨 결정 구조 내 함유된 물 분자가 증발되지 않도록 봉지화(encapsulation)하는 등 후처리 공정을 개발해 안정성을 높이는 것이 다음 연구 과제다.

나노광공정연구실은 광학적 방법을 활용한 정밀 가공 공정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더욱 커지는 나노광공정 연구 유니버스

이 외에도 홍석준 교수는 지난 2021년 서울대 연구팀과 함께 배경에 따라 몸체의 색깔이 바뀌는 일명 카멜레온 로봇 피부를 개발해 ‘네이처 커뮤니케이션(Nature Communications)’에 게재한 바 있다. 카멜레온 로봇에는 레이저 소결(열이 가해진 분말이 결합·응고되는 현상)과 레이저 어블레이션(레이저를 집광해 물질을 제거하는 과정) 공정을 적용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필름에 레이저를 조사하는 방식으로 스프링 형태의 그래핀을 개발해 어드밴스드 사이언스(Advanced Science)에 논문 게재 승인을 받은 상태다. 카멜레온 로봇에서 PUF 그리고 그래핀까지, 얼핏 보면 연구 분야가 광범위해 종잡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들 연구들은 하나의 키워드로 접점을 이룬다. 바로 레이저를 활용한 광학적 공정기술이다. 이에 대해 홍석준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저희 연구실 명칭이 ‘나노광공정연구실(Optical Nanoprocessing Laboratory)’인 만큼 가장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분야는 레이저로 대표되는 광학적 방법을 활용해 물질을 미세 혹은 정밀하게 가공하는 공정기술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을 개발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가공하고자 하는 재료와 해당 공정을 적용할 수 있는 응용 분야에도 관심을 갖게 됩니다. 카멜레온 로봇 , PUF, 스프링 그래핀 모두 새로 개발된 광공정에 의해 구현된 응용 분야들이죠.”

새로운 광학적 공정기술을 개발하다 보니 자연히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분야로 연구 대상이 확대됐다는 설명이다. 이번에 아세트산 나트륨 과포화 용액을 사용한 PUF 소자를 개발하면서 나노광공정연구실은 광학적 PUF라는 새로운 연구 분야를 하나 더 개척하게 됐다. 이에 그치지 않고 반도체 제작 공정을 획기적으로 바꿔줄 레이저를 활용한 변환 공정에 대한 연구도 계획하고 있어 앞으로 홍석준 교수의 연구 세계가 얼마나 더 확대될 지 기대된다.

“레이저를 활용한 물질 가공 기술은 기존 기술을 단순히 대체하는 기술과 기존 기술 대비 확연한 장점이 있는 기술, 그리고 기존 기술로는 불가능했던 기술의 세 가지 범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저에게는 마지막 범주의 기술을 구현하는 것이 가장 의미가 큽니다. 현재도 앞서 말씀드린 PUF 후속 연구뿐 아니라, 아직 밝혀지지 않은 다양한 광공정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정진하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