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우리나라의 극지 연구 인프라를 실시간 모니터링 할 수 있는 극지연구소의 종합상황실. 전방의 대형 모니터에는 북극의 다산과학기지와 남극의 세종과학기지 및 장보고과학기지의 현재 시각, 온도, 습도, 풍속 같은 기상정보와 실시간 위성사진이 송출되고 있다. 동이 트기 시작한 다산과학기지와 달리 지구 정 반대편에 있는 세종과 장보고과학기지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있다. 옆 모니터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쇄빙연구선인 아라온호가 전남 광양항에 정박해 있는 모습도 보인다. 몇 주 전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실험 장비를 하역하는 중이다.
“극지연구소에서 운영하는 극지 연구 기반 시설들 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종합상황실 구축을 제안했습니다.”
다음으로 안내받은 장소는 국내 유일의 극지과학전문 도서관인 ‘이글루’로, 극지 관련 단행본과 연속 간행물, 국내외 기관 자료들을 보유하고 있다. 종합상황실과 마찬가지로 이글루 또한 강천윤 동문이 지식정보실에서 근무할 당시 제안해 딱딱한 도서관의 이미지에서 탈피, 아라온호가 얼음을 뚫으며 전진하는 모습을 본뜬 도서복합문화공간으로 꾸며졌다. 전국도서관 운영평가에서 우수도서관으로 선정돼 2018년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장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아이디어 뱅크인 강천윤 동문의 제안으로 탄생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남북극 과학기지의 운영을 담당하는 극지지원실에서 근무할 때는 국내 통신사 인터넷 전산망을 구축하고, 해저에 있는 퇴적물을 채취할 때 사용하는 중력 시추를 개발하기도 했다. 중력 시추는 극한의 환경 속에서도 조립과 해체 작업을 빠르게 진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손재주가 있어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만, 남극과 북극에 애정이 많습니다. 그래서 연구 인력들이 현장에서 보다 편안하게 연구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개선하거나 지원하는 데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행정부나 감사부 등 과학기지 지원과 무관한 부서에서 근무할 때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했죠. 관심을 갖고 주변을 살펴보면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합니다.”
강천윤 동문의 아이디어 원천은 바로 극지에 대한 사랑이었다. 지나는 말이라도 극지 과학기지에서 내 집처럼 편안하게 지냈다는 대원들의 한마디는 강천윤 동문의 자긍심을 높여준다.
북극해로만 이뤄진 북극과 달리 남극은 남극해와 대륙으로 구성된 거대한 지역으로 한반도의 62배에 이른다. 눈, 얼음, 퇴적물, 암석 등의 기록이 보존돼 있어 지구의 기후나 환경변화 연구의 보고일 뿐 아니라 대기권, 빙권, 지권, 수권, 생물권 등 천연의과학 실험장이다. 또한 수산, 석유, 가스, 광물 등 자원이 풍부해 세계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극지 연구에 뛰어들고 있다. 우리나라도 1988년에 해양, 생물 자원 등 남극 연근해 연구를 중점적으로 수행하는 세종과학기지를, 2014년 2월에 지질, 빙하, 운석 연구를 하는 장보고과학기지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남극의 얼음 아래 있는 퇴적물은 과거의 지구환경 기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현재보다 평균 기온이 1~2도 높았던 4000~8000년 전의 지구환경을 남극 퇴적물에서 유추할 수 있죠. 이러한 퇴적물 시료는 앞으로 지구온난화가 얼마나 빠르게 진행될지, 온난화 이후 지구환경이 어떻게 바뀔지 알려주는 중요한 연구 자료입니다. 또한 기후변화가 시작되는 기후변화 민감 지역으로서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을 체감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강천윤 동문은 30여 년간 극지연구소에서 근무하며 일반인은 평생 한 번도 가기 어려운 남극을 19차례나 다녀왔다. 지낸 기간을 월수로 환산하면 60개월이 넘는다. 그러다 보니 새천년인 밀레니얼을 세종과학기지에서 맞는가 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새해를 맞는 장보고과학기지에서 2015년 월동연구대 최초로 남극대륙에서 첫날을 맞기도 했다. 강천윤 동문은 남극 과학기지에서 13차례나 현장 조사에 참여해 양질의 고기후 및 고해양 연구 자료를 획득했다. 그리고 이를 활용한 연구논문의 공저자뿐 아니라 고해양 환경해석 및 고기후 복원에 도 참여했다. 이렇게 극지 연구 활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제27회 바다의 날’에 산업포장을 받았다.
후배들이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책무 다할 것
한 번 월동연구대에 참여하면 일여 년간 극지 과학기지에서 상주해야 한다. 빙하로 둘러싸인 과학기지에서 악천후를 견디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해가 뜨지 않아 3개월간 어둠이 지속되는 극야기간에는 기온이 영하 30도 이하로 내려가고 풍속은 40m/s나 되며 시정거리가 1m도 안 되는 눈 폭풍(블리자드)이 짧게는2~3일간 휘몰아친다. 한 번은 현장 조사에 나갔다가 눈 폭풍 속에서 조난을 당해 극적으로 구조된 적도 있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음날 화창한 날씨 속에 천혜의 경관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곳이 남극이다. 그래서일까. 강천윤 동문은 19차례나 남극을 다녀왔음에도 여전히 남극을 열망한다.
“남극의 경이로운 자연환경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난센 빙붕의 경관이 멋지죠. 일반인들이 버킷리스트로 꼽는 오로라도 수시로 감상할 수 있고요. 무엇보다 생사를 같이하는 월동연구대 대원들과 끈끈한 정을 쌓으며 평생 인연을 만들 수 있어 좋습니다.”
최근 강천윤 동문은 국가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삭감된 R&D 연구 예산을 복원하고, 기초과학 연구에 대한 투자 확대를 촉구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현재 과학기술계 정부출연연구기관과 특정 연구기관의 공적 기능 및 위상을 확립하고, 조합원의 권익 보호와 지위 향상을 위해 설립된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의 위원장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R&D는 미래 성장 동력이며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의 초석입니다. 또한 미래 먹거리 창출의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에너지 전환, 디지털 전환, 기후위기 대전환이 전 인류의 시급한 사명이 된 중차대한 시기라 과학기술의 역할이 더욱 막중한 때입니다. 그런데도 국가의 R&D 예산을 삭감해 국가의 과학기술체계가 무너지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강천윤 동문의 극지에 대한 사랑은 이렇게 극지 과학기지에 대한 지원에서 국가의 과학기술 발전을 염원하는 제언으로 확장됐다. 그래서 과학기술 및 해양 연구를 꿈꾸는 후배들에게도 지속적인 관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후배들이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은 저희 기성세대의 역할이니 저는 그 책무를 다하겠습니다. 후배들은 해양 연구에 대한 관심을 계속 가져주기를 바랍니다. 관심과 열정을 기울이면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